易學原理總論6-5

원고판독6-5 <역학원리총론 삼화 한장경 저>

 

 

 

100-2

惡이 쭉정이로 되는 것은 무슨까닭인가 하면 神은 사람의 自由로운 生生을 爲하여 또 自由로이 자라게 하기 爲하여 사람의 자라는 동안에 사람에게 自由意志를 賦與하고 사람은 自由意志에 依하여 모든 所願을 成就하는 것이므로 神은 사람이 自由意志를 行使하는 동안은 善惡間에 사람의 行爲를 그대로 許하고 사람의 所願하는대로 따라가시는 것이니 이는 사람에게 自由意志가 있은 然後에 充分히 자랄 수 있는 까닭이며, 사람의 言行은 天地圜行의 理에 의하여 善惡間에 모두 神에게로 올라가고 神은 그것을 받으시는 대로 모두 그 사람에게 돌려주시어 그 사람의 所願을 成就시키시는 것이다. 卽 사람은 善을 行하면 善이 쌓여서 자라고 惡을 行하면 惡이 쌓여서 자라는 것이며, 善의 자란 것은 열매가 여물어서 永遠한 씨가 되는 것이오 惡의 자란 것은 쭉정이가 되어 生生이 끊어지는 것이니, 사람이 善을 行하는 者는 열매가 되기를 願하는 者이오 惡을 行하는 者는 쭉정이가 되기를 願하는 者이라, 自身의 自由意志로써 善惡을 行하여 열매가되고 쭉정이가 되고 하는 것은 모두 그 所願을 成就하는 일이다.

坤卦에「積善之

 


 


101-1

家必有餘慶 積不善之家必有餘殃」이라 하니 이는 사람이 自由意志로써 善惡을 積하여 그 所願하는 慶殃을 받음을 말함이며, 여기에도 또한 圜運動의 象이 있으니, 自家에서 善함이 나가면 반드시 善의 應報가 돌아오고, 自家에서 不善함이 나가면 반드시 不善의 應報가 돌아오는 것인데, 自家에서 나가서 自家에 돌아오는 것은 空間的 圜運動이오, 지금에 나가서 後日에 돌아오는 것은 時間的 圜運動이다. 여름에 草木의 자랄 때에는 어느 열매가 알맹이로 되고 어느 열매가 쭉정이로 되고 할 것을 分別할 수가 없는 것이나, 가을이 되면 알맹이와 쭉정이가 스스로 選別되어 알맹이만 남고 쭉정이는 消滅되는 것이니, 이는 天地의 生生法則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라는 때에 自由意志의 길을 바르게 向하여 充實히 자라면 알맹이가 또한 充實히 여무는 것이오 充實히 자라지 못하면 비록 成의 時運이 到來하더라도 充實한 알맹이가 되지 못하는 것이며, 지금의 人間은 長의 時運에 處하여 아직 여물지 못한 未成品이 되고 있으므로 惡을 行하는 일이 있어 쭉정이로 되는 者가 적지 아니한 것이다. 人體로써 보면 健康은 사람의 生命을 完全히 하는 것이므로 善하여 알맹이의 象이 되고 疾病은 사람의 生을 害하여 死에 이르게 하는 것이므로 惡하여 쭉정이의 象이 되는 것이다.

 


101-2

人間社會안에 사람의 生을 害하는 惡人이 있는 것은 사람의 身體에 疾病이 있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身體의 疾病을 治療하여 그 生을 完全하게 하는 것은 비록 疾病治療中에 그 사람에게 苦痛을 주고 身體一部를 手術하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善이 되고 惡이 되지 아니하는 것이며, 이 理에 依하여 社會안의 惡人의 自由를 拘束하고 嚴刑을 加하고 하는 것은 社會의 疾病을 治療하여 그 社會의 生을 完遂하기 爲함이니, 그러므로 이것은 善이 되고 惡이 되지 아니하는 것이며, 革卦에「湯武革命順乎天而應乎人」이라 함은 天時와 人心에 順應하여 社會안의 惡政治를 除去하고 社會의 生을 完遂하는 事業을 行함을 革命이라 한 것이다. 여기에 革命

 


 

102-1

이라 함은 順天應人하는 革命을 말하는 것이므로 革命은 善한 것이며, 長의 時運에 勢力의 强弱으로써 서로 政權을 爭奪하는 것은 비록 政權을 奪取하되 그것은 社會를 生生하는 運動이 아니므로 革命이라고 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性惡說

사람의 天性을 惡하다고하는 性惡說이 있는데, 天性은 사람의 모든 行爲를 主宰하여 人體의 健康함과 같은 것이므로 天性은 반드시 善한 것이며, 저 所謂 性惡說은 마치 世間에 疾病에 걸린 사람이 많음을 보고 사람의 몸은 疾病으로서 組織되었다 함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몸은 健康으로서 組織되고 疾病 같은 것은 一時的 不健康 現象에 不過한 것이니, 그러므로 사람의 天性은 善한 것이오 저 惡같은 것은 生長競爭의 過程에서 天性이 疾病에 걸려서 一時的으로 發生하는 것이오 天性에는 惡이 없는 것이다.

 


 

102-2

天命은 一生의 使命

사람에게는 自由意志가 있어 神의 自然法則을 어기고 惡의 發生하는 일이 있으므로 사람은 그 出生하는 때에 自體의 生生을 營爲함에 必要한 天性을 天으로부터 稟受하는 同時에 또한 世上에 出生하여 어떠한 일을 한다는 使命을 天으로부터 아울러 稟受하니, 이가 天命이오, 乾卦에 「乾道가 變化하여 各各 性命을 正한다」함은 物이 天性과 天命을 바르게 行한다 함을 말함이다. 天性은 圓深通明하여 空間의 象이 되고 天命은 사람의 一生동안에 遂行할 바의 使命이므로 時間의 象이 되는데, 空間은 사람의 自由意志에 依하여 그 一部를 變改할 수가 있으므로 天性에는 自由가 있어 能히 空間의 自然物에 對하여 人工을 加할 수가 있는 것이오 時間은 사람의 힘의 全然 미치지 못하는 境域이므로 스스

 


 

103-1

로 旣定된 使命이 있어 사람은 天時를 奉行하면서 그 使命을 다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生物이 無形에서 有形으로 化하여 이 世上에 生한 者는 반드시 天命을 받고 있는 것이니, 이는 모든 生物이 世上에 나올 때에 다만 偶然忽然히 되는대로 오다가다 나온 것이 아니라 모두 神의 體의 一部分을 나눠 받고 나온 까닭이다. 植物이나 動物은 數多한 種類로 나뉘어서 生하고 있는데, 이들은 形質을 主로 하고 있으므로 그 所謂 天命이라는 것은 그 種類의 形質의 生生繼承하는 일이니 그 一例로는 楊木은 楊木으로 生하여 楊木의 씨를 保有하는 것이 그의 天命이오, 桑木은 桑木으로 生하여 桑木의 씨를 保有하는 것이 그의 天命이오, 牛는 牛로 生하여 牛


 

103-2

의 씨를 保存하는 것이 그의 天命이오 馬는 馬로 生하여 馬의 씨를 保存하는 것이 그의 天命이다. 그러므로 楊桑牛馬는 모두 그 種類대로 共通한 個性을 가지고 同一한 任務를 遂行하여 모두 自然스럽게 그 天命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單一種類로 되어 共同生活의 社會를 組織하고 사람의 生活은 極히 複雜하여 반드시 分業協業이 있는 것이므로 사람은 그 種類는 單一하고 있으되 그 性格 知識 技能 같은 個性은 實로 千差萬別한 것이니, 사람의 個性의 千萬가지 差異는 動植物의 千萬가지 種類의 差異와 匹敵하는 것이며, 사람의 自由意志에 依한 分業協業으로써 神의 事業을 祐하기 爲하여 各其 獨殊한 性格 知識 技能等 個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곧 天命이다. 사람은 獨殊한 個性을 가지고

 


 

104-1

神의 事業을 祐하는 것으로써 一生의 使命을 삼고 있으므로 사람은 動植物과 같이 自體의 形質이 자라고 子孫을 繁殖하고 하는 것으로는 天命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動植物은 數多한 種類로 나뉘어 있으므로 그 種族保存이 한 使命으로 되어 있으나, 사람은 世界人類가 모두 單一種類로 되고 있으므로 그 種族의 保存은 天命이 되지 아니하고 人類全體의 生生을 爲하는 事業이 天命으로 되는 까닭이며, 사람이 자라는 동안에 自由意志로써 그 使命을 다하는 것은 天命을 順함이되고 使命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天命을 逆함이 되는 것이다.

天命인 使命은 사람의 一生동안에 遂行하는 일이므로 어느 一面으로는 運命도 되는 것이니. 마치 動植物의 楊桑牛馬는 一生을 楊桑牛馬로 될 수밖에 없는 까닭에 完全히 運命으로 되어 있음과 같은 것이다. 이런 面으로 볼 때에는 사

 


 

104-2

람의 天命도 또한 運命이 되는 것이오, 또 사람의 살고 있는 時運도 時間에 屬하여 있으므로 또한 運命이 되는 것이니, 사람은 時運이라는 運命의 속에서 살면서 그 稟受한 바의 使命을 다하고 있으므로 그 一生의 活動은 스스로 運命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時間속의 人間의 實生活은 空間에 屬하니, 空間에 屬하는 일은 人工으로써 善하게 할 수도 있고 惡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비록 어떠한 時運이 到來하더라도 사람은 그 時運에만 依存하는 것이 아니오 空間에 屬하는 일은 最善의 人工을 加하여 人間生活에 利用하고 人工으로써 할 수 있는 人事를 다한 然後에 時運을 待하는 것이 곧 天命을 順함이다.

天性과 天命은 하나는 自由이오 하나는 運命으로서 서로 對立

 


 

105-1

하고 있는듯하나, 두가지가 모두 天으로부터 稟受한 것으로서 그 本源이 同一하므로 사람은 그 自由意志로써 天性의 至善을 다하고 天命을 順하여 사람을 生養하는 事業을 行하는 때에 天性의 自由와 天命의 運命이 스스로 一致하는 것이니, 說卦에「理를 窮하고 性을 盡하여 써 命에 至한다」함은 天性과 天命의 一致한 境地를 말함이오 天性과 天命의 一致한 者는 天性의 여문 者이다.

그러나 사람은 自身의 稟受한 天命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어렵고, 天命을 알지 못하고서 자기가 이 世上에 태어난 使命을 다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비록 天命을 알지 못하고 있으되 人間으로 神을 祐하는 일을 行하면 또한 스스로 使命을 다하는 일이 되는 것이니, 이는 人類의 共同生活에는 여러 가지의 分業協業이 있으되 그 歸着하는 곳은 모두 神을 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05-2

第三節 孝 忠 義는 三大倫

孝忠義는 神道이다

사람의 行動하는 倫理로서 神과 相通하는 三大倫이 있으니, 三大倫이라 함은 父子道의 孝와 國民道의 忠과 夫婦道의 義를 말함이다. 孝忠義의 三大倫은 神의 垂示하신 天倫인데, 長의 時運의 사람들은 자라는 過程에 있어 生長競爭을 行하여 自己의 自由意志를 主張하고 神의 뜻을 알지못하여 이 天倫을 바르게 쓰지 못하고 도리어 當時의 君主와 貴族들에게 잘못 利用된 일도 있는 것이며, 成의 時運에는 이것이 人間社會의 最大 倫理로 되는 것이다. 三大倫은 남만을 爲하는 것이 아니라 結果的으로는 自身의 生生을 爲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또한 天地가 圜運動을 하여 自身에서 나간 善不善이 다시 自身에게로 돌아온다는 原理도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三大倫은 人間社會의 모든 道德의 發源이 되는 것이다.

 

孝의 原理

孝는 天地의 生生原理의 中心이 되고 있는 것이니,

 


 

106-1

사람이 生하고 자라고 함에는 神으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祖上父母의 天命의 줄을 通하여 天命을 받는 것이므로 天命의 줄을 連繼하는 것이 곧 孝이다.

 

註 ●孝의 理

萃卦에「王假有廟致孝享也」라 하여 子孫이 廟를 세워서 父母의 神을 奉享하는 것을 孝라 하고 그 다음에「用大牲順天命」이라하여 母가 子의 出生을 爲하여 自身은 犧牲하는 것을 天命이라 하니 이는 父母가 終하고 子가 父母를 繼承하여 天命을 잇는 것이 곧 孝라 한 것이다.

사람의 살고 있는 이 地球는 太陽을 中心으로하여 公轉하고 神이 또한 太陽에 位居하심으로 사람은 地球와 함께 太陽

 


 

106-2

을 公轉하면서 또한 神을 中心으로하여 圜行하는 것이오, 太陽과 地球와의 사이에 電氣와 磁氣를 因한 引力의 줄이 있으므로 神과 사람과의 사이에도 또한 天行健의 雷風의 氣를 因한 天命의 줄이 있어 祖孫系統의 줄이 되고 있는 것이다. 圜運動은 遠心運動과 向心運動으로 되어 있는지라, 사람이 無形한 天祖神에서 出生하여 有形으로 되어 子子孫孫이 한 世代씩 늘어 나가는 것은 中心에서 멀어지는 遠心運動이오 사람의 遠心運動은 各人마다 그 位置가 다르고 世代마다 그 軌道가 늘어나서 同一한 位置 同一한 軌道를 걷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그러므로 사람은 얼굴이나 性質의

 


 

107-1

全然 同一한 者는 한 사람도 없는 것이오, 사람의 出生한 以後에 그 向하여 나가는 길은 有形으로부터 다시 無形으로 되어 天祖神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니, 이는 中心을 찾아가는 向心運動이며, 그러므로 사람은 그 出生하는 날부터 一生동안의 걸어가는 行路는 神의 계신 곳으로 向하여가는 것이다.

 

사람은 神을 中心으로하여 間斷없이 遠心運動과 向心運動을 아울러 行하고 있으니, 遠心運動을 行하는 것은 空間的으로 無限히 擴大하기 爲하여 無形에서 有形이 生하여 中心에서 멀어지는 것이며, 이는 사람의 形質의 자라는 運動이오, 向心運動을 行하는 것은 時間

 


 

107-2

的으로 無窮히 繼承하기 爲하여 遠心의 終點에서 未來의 始點을 찾아서 無形한 中心을 向하여가는 것이며, 이는 사람의 天性의 여무는 運動이다. 天地의 生生運動은 모두 圜運動으로 되고 直線運動은 없는지라, 사람이 祖上으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은 그것이 生生運動이므로 반드시 圜運動이오 直線運動이 아니며, 圜運動에 連結되어 繼續하는 生生運動은 또한 圜運動이므로 사람이 向하여가는 길도 또한 直線이 아니오 반드시 圜運動이니, 그러므로 사람이 圜運動을 行하여가는 길은 그것의 圓形이거나 螺旋形이거나를 勿論하고 반드시 始發하는 中心을 向하여 圜行하는 것이다.

 


 

108-1

사람이 神을 中心으로한 遠心運動과 向心運動은 스스로 神과 사람과의 사이에 連繼되어있는 줄을 通하여 行하는 것이오 이 줄은 사람의 祖上이 神에서 出生하여 世世로 繼承하여 내려오는 줄이므로 이것은 天命의 줄이 되는 것이다. 地球와 太陽과의 引力의 줄은 遠心運動의 줄과 向心運動의 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相反되는 두 運動을 한 줄로써 行하고 있음과 같이, 神과 사람과의 天命의 줄도 또한 한줄로 되어 있어 祖上으로부터 世世連續하는 遠心運動의 줄이 곧 사람이 神에게로 圜行하는 向心運動의 줄이 되어, 사람이 神에게로 돌아감에는 반드시 祖上父母의 내려오신 줄을 도로 걸어 올라가는 것이다. 神과 사람과의 天命의 줄에는 祖上父母의 位도 있어 神을 向하는 向心運動은 반드시 同一한 줄에 位하신 여러

 


 

108-2

祖上父母의 마디를 거쳐서 올라가는 것이므로 神을 向하는 마음이 곧 祖上父母를 向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神의 事業을 祐하는 때에 비로소 天命의 줄이 連繼되어 神에 對한 孝가 되는 것이오, 神을 向하는 마음이 곧 祖上父母를 向하는 마음이므로 神에 대한 孝가 바로 祖上父母에 對한 孝가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神에 對한 孝가 없이는 祖上父母에도 孝가 되지 못하며, 또 祖上父母에 對한 孝가 없이는 神에도 孝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神에 對한 孝라함은 사람이 神의 事業을 祐하는 일이라, 사람이 神을 祐하면 神은 圜運動의 理에 依하여 사람의 祐를 받으시는 대로 天惠를 내리어 사람을 祐하시는 것이니, 이는 사람이 神을 祐하는 일이 또한 自身이 神의 祐를 받는 結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神에게 孝하는 것은 또한 自身

 


 

109-1

의 生生을 爲하는 일이오 神이 天惠를 내리어 사람을 祐하시는 것은 또한 그 子孫을 生養하여 永遠한 生生事業을 行하시기 爲함이니 이와 같이 神과 사람이 相祐하여 天地가 永遠不窮히 生生하는 것이 孝의 原理로 되는 것이다.

孝의 原理로써 보면 子孫이 祖上父母를 爲하는 것은 곧 自身의 生生을 爲하여 自身과 神과의 天命의 줄을 連繼하는 일이오 祖上父母가 子孫을 愛育하는 것은 또한 自身의 世世繼承하는 生生을 爲하여 自己子孫과 神과의 天命의 줄을 連繼하는 일이다. 子孫이 祖上父母를 爲하고 祖上父母가 子孫을 愛育하고 하는 것은 모두 自己의 生生을 爲하는 일이면서 또한 子孫은 祖上父母의 功德을 報答하고 祖上父母는 神의 子孫을 生養하여 神의 事業을 祐하는 것이니 祖上父母와 子孫과의 사이는 自와 他를

 


 

109-2

超越하여 同一한 天命의 줄위에서 生生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孝라는 것은 다만 生存한 父母를 爲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天性을 여물게하고 神의 사업을 祐하여 神을 向하는 마음과 이미 作故하신 祖上父母를 向하는 마음이 一致하고 아울러 手下의 子孫들에게 善言善行을 垂範하여 祖上父母와 手下子孫들과의 사이에 天命의 줄이 連繼되게하는 것이 곧 作故하신 祖上父母에 對한 孝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祖上神에서 出生하여 時間的 繼承으로는 祖上과 子孫의 繼世하는 系統이 되고 空間的 擴大로는 世界人類의 連枝하는 兄弟의 誼가 되는데, 사람이 神의 事業을 祐하여 사람을 生養한다 함은 別다른 남이 아니오 곧 자기의 世界兄弟를 生養하는 것이다. 世界人類는 비록 皮膚色이 서로 다르고 言語風俗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 하더라도 모두 同一神에서 出生하여 同一祖上을 모시고 있는 兄弟이오

 


 

110-1

비록 寸數의 늘고 밭고 한 差異는 있다 하더라도 各自 分離된 남남이 아니며 소위 同民族과 異民族의 差異라는 것은 다만 寸數의 늘고 밭고 함과 婚姻을 通하고 通치 아니하고 한 差異 밖에는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사람이 有形한 肉體로써 서로 接觸하는 것은 極히 局限되어 있으되 無形한 天性에는 神의 作用이 있어 全人類가 모두 共通한 것이니, 易卦에는 달에서 사람의 씨의 生함을 象한 卦名을「同人」이라 하고 거기에 또「天下의 志를 通한다」고한 것은, 人類의 씨가 모두 달에서 出生하여 그 本源이 同一하고 天下사람의 志가 서로 通한다 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世界人類가 兄弟의 誼로써 서로돕고 서로 親和하는 것은 神의 生生事業을 祐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곧 神에 對한 孝가 되는 것이다.

 

 

忠의 原理

忠은 사람은 自體가 生生하기 爲하여 心의 體인 德을 光明케하여 自體가 所屬하여 있는

 


 

110-2

社會의 生生을 돕고 事業을 修하는 것이 곧 忠이다.

 

註 ●忠의 理

乾文言에「忠과 信이 써 德을 進하는 바이라」한바 德이라 함은 사람이 物을 生養하는 마음의 體를 말함이니, 忠은 中心으로부터 物을 愛育하는 마음이 솟아나옴을 말함이오 마음이 忠하면 能히 物을 生養한다 함이다.

사람은 國家社會의 共同生活體의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 共同體의 生生을 爲하여 中心에서 나오는 共同生活 精神이 곧 忠이다. 사람은 그 社會에 出生하는 날에 스스로 그 國家社會의 一員이 되어, 國家社會의 生生이 곧 自身의 生生과 直結되는 것이므로 國民은 國家의 生生을 爲하여 忠하는 것이 곧 自身의 生生을 爲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自身의 生生을 爲하여 各其職務를 通하여 自己를 利하고 아울러 社會를 利하여 사람을 生養하는 일에 參與하는 것은 國家社會의 生生을

 


 

111-1

爲하는 忠이 되는 同時에 또한 神의 事業을 祐하여 神에 對한 忠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生活에는 形質로된 肉體의 生活과 天性作用인 精神의 生活과의 二元作用이 있는데, 肉體는 有形한 個體로 되어 個個人의 獨自한 것이므로 肉體生活은 個體를 中心으로하여 行하는 것이니, 이가 곧 本能生活이오 精神은 無形한 氣로서 人類共通한 것이므로 精神生活은 全人類의 所自出한 神을 中心으로 하여 行하는 것이니, 이가 곧 理性生活이다. 사람의 精神은 神을 中心으로하여 生活하고 있으므로 祖上父母에 對한 孝가 또한 神에 對한 孝가되고 國家社會에 대한 忠이 또한 神에 對한 忠이 되는 것이며 同一히 神을 祐하는 일에 孝와 忠의 分別이 있는 것은 무슨까

 


 

111-2

닭인가 하면, 이것을 繼繼生生하는 祖孫傳承關係로써 볼 때에는 孝가되고 共同生活하는 上下組織關係로써 볼 때에는 忠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植物의 形質을「生」의 基本組織으로하여 自然法則을 따르고, 動物의 本能을「자라는 作用」으로하여 自由로이 行動하며, 또 이들 植物과 動物을 生活資料로 하여 生生하고 있으므로 사람의 生生法則이 植物動物과 同一하고 사람의 忠孝의 理도 또한 植物動物의 生理와 相通하는 것이다. 草木이 뿌리로부터 漸次로 生長하여 本末의 次序가 있는 것은 사람이 祖上으로부터 代代로 繼承하는 形態와 같고 草木의 生長에 節이 있는 것은 사람의

 


 

112-1

祖孫傳承하는 寸數의 形態와 같으니 根本은 祖上父母의 象이오 枝葉은 子孫의 象이라 草木의 枝葉은 그 所自出한 根本을 庇護하기 爲하여 枝葉을 뿌리의 伸張한 範圍만치 伸張시켜 뿌리가 日光에 乾燥됨을 防止하고 뿌리는 水分과 營養을 吸收하여 枝葉에 傳達하여 根本과 枝葉이 모두 그 自體의 生生을 爲하여 서로 庇護하고 서로 養育하니 이는 사람의 祖上父母와 子孫이 서로 그 自體의 生生을 爲하여 天命의 줄을 連繼함과 같은 것이며, 草木의 枝葉이 그 根本을 爲하는 것은 孝의 象이 되므로 사람이 祖上父母를 爲하는 孝는 草木의 孝의 理와 相通하는 것이다.

動物體의 各器官은 順次的으로 生長分岐하는 草木과는 달라서 그 出生하는 때에 統體가 이미 組織되고 있는 것은 사람이 出生하

 


 

112-2

면서 스스로 그 所屬한 共同生活體의 一員이 됨과 같고 動物體의 各器官이 그 自體의 生生을 爲하여 共同으로 그 統體의 生生을 營爲하는 것은 사람이 自體의 生生을 爲하여 그 所屬한 國家社會의 生生을 돕고 있음과 같은 것이며, 動物體의 各器官이 그 統體를 爲하는 것은 忠의 象이 되므로 사람이 國家社會를 爲하는 忠은 動物體의 忠의 理와 相通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天地間의 모든 生物의 生生은 모두 孝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序卦에「有夫婦然後有父子 有父子然後有君臣 有君臣然後有上下 有上下然後禮義有所錯」이라 하니 父子는 植物體의 象이오 君臣의 權力組織인 國家道는 動物體의 象이오 上下道는 自然秩序인 禮義의 錯하는 人道의 象이니, 이는 植物이 있은 然後에 動物이 있고 動物이 있은 然後에 사람이 있다하는 象이다. 父子道는 父母가 全力을 다하여 子女를 生養하여 國家社會에 바치는 것으로서 이는

 


 

113-1

植物이 自體를 犧牲하여 動物體를 生養하는 象이오 國家道는 國家가 全力을 다하여 사람을 生養하여 그 天性을 여물게 하는 것으로서, 이는 動物이 自體를 犧牲하여 사람을 生養하는 象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自體를 生養하여주는 植物動物의 恩德을 잊지 아니하는 것은 바로 自體를 生養하여주는 父母 國家의 恩德을 잊지 아니하는 行爲와 相通하는 것이오 이 自體를 生養하여주는 恩德을 잊지 아니하는 것이 곧 孝忠의 길이다.

 

義의 原理

義는 義라함은 陰陽兩物이 서로 和合하여 하나의 새로운 合同體를 이루는 것이오 그러므로 一夫一婦의 配合하는 것을 天地의 大義라 한 것이다

 

註 ●義의 理

家人卦에「男女正天地之大義」라 하고 歸妹卦에「天地之大義」라 하니 이는 夫婦의 陰陽和合을 義라 한 것이다.

사람의 社會生活은 家庭을 基本單位로 하여 行하는 것이므로 家人卦에는「家를 正하매 天下가 定한다」하여, 各個의 家庭이 社會組織의 基本이 되고 있음을 말하고, 또 「男이 外에 正位하고 女가 內에 正位하여 男女가 正함은 天地의 大義」라 하여 夫婦라 함은 一男一女가

 


 

113-2

서로 和合하고 各其 內外의 位가되어 한 家庭을 이루는 것이므로 一夫一婦가 相配하는 것이 곧 大義라 함을 말하고, 損卦에는「三人이 行하면 一人을 損하고 一人이 行하면 그 友를 得한다」하여, 二人相配하는 一夫一婦制가 天地의 道라 함을 말한 것이다. 天下의 衆男衆女中에서 오직 一男一女가 相合하여 夫婦가되니 그 夫婦의 義가 大한 것이오 夫婦가 된 然後에는 一生동안에 夫는 一婦를 爲하고 婦는 一夫를 爲하여 함께 살고 있으니, 그 夫婦의 義가 和한 것이며, 男女가 一夫一婦의 義를 지키는 것은 서로 그 相對便을 爲하는 일인 同時에 또한 서로 그 自身의 生生을 爲하는 일이다.

易卦에는 男女의 婚姻 夫婦의 家庭 童蒙의 出生의 세곳에 모두 神道를 말하니, 이 세 가지는 家庭生活의 主要한 일이오 그 中에서도 家庭의 秩序를 세우는 夫婦의 義가 그 中心이 되고 있어 家道를 正한 然後에 國家社會의 生生事業도 行할 수가 있고 孝忠

 


 

114-1

한 子孫도 이러한 家庭에서 出生할 수가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夫婦間에 義의 和한 家庭은 또한 사람을 生養하는 神의 事業을 祐하여 神道가 行하는 것이다.

 

●生活의 體用

世間에는 個人主義思想을 가지고 自己의 個體의 生만을 爲하고 他人의 生을 不顧하는 일이 許多한데 이것은 生活의 體用을 알지못하는 까닭이다. 自體의 生을 爲하는 것은 生活의 體이오 他人의 生을 爲하는 것은 生活의 用이니, 사람은 내가 남을 爲하는 때에 남이 또한 나를 爲하여 비로소 共同生活을 營爲하는 것이라, 사람이 自體의 生만을 爲하고 남의 生을 爲하지 아니하면 이는 生活의 體만있고 生活의 用이 없는 것이므로 그 사람은 남으로 더불어 共同生活을 營爲하지 못하고 孤立 獨存한 生活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오 人間은 孤立獨存으로서 生活할 수는 없는 것이다. 忠孝義의 原理도 實은 生活의 體用에서 生한 것이다.

 


 

114-2

第五章 未來의 成의 時運

第一節 世上의 變化

■ 先天과 后天의 時運

지금 이 時點은 萬物의 자라고 있는 長의 時運이오, 物의 자라는 者는 반드시 여물어서 成하는 것이므로 앞으로 오는 未來時運은 成의 時運이다. 옛적에 生의 時運으로부터 長의 時運으로 넘어올 때에는 生의 時運을 先天이라 하고 長의 時運을 后天이라 하였는데 지금에는 長의 時運으로부터 장차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서 先世 乾坤으로부터 次世代의 乾坤이 生하는 것이므로 生과 長의 두 時運을 合하여 모두 先天이라 하고 成의 時運을 后天이라 한다. 后字는 後라는 뜻과 女王이라는 뜻과 先世를 繼體한다는 뜻과의 세 가지 뜻이 있으므로 長하는 陽運의 後에 成하는 陰運이 繼하고 陰運은

 


 

115-1

女의 象이라 하여 未來의 成의 時運을 后天이라 한 것이다.

時運의 長과 成의 象을 樹木의 生生으로써 보면 여름에 樹木의 陽氣가 內部로부터 外部에 發宣하고 水液이 뿌리로부터 위로 逆上하고 無形에서 有形한 줄기 가지 잎사귀가 나와서 여러 갈래로 나뉘우고 하는 것은長의 時運의 象이오, 가을에 外部의 陽氣가 樹木의 內部에 들어가서 收斂하고 水液이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와서 뿌리로 돌아가고 열매가 여물어서 次世代의 씨로 되고하는 것은 成의 時運의 象이다. 지금의 長의 時運의 일을 옛적의 生의 時運의 일에 比하여 보면 人間界의 일만으로써 보더라도 無形에서 有形이 生한 것과 少에서 多가 生한 것이 그 大部分이니, 옛적보다 人

 


 

115-2

文이 發達하고 人口가 膨脹한 것도 長의 象이오 사람들의 各種 生活資料와 여러 가지 器物이 새로 發明된 것도 또한 長의 象이다. 그런데 生의 時運에서 長의 時運으로 넘어올 때에는 一年으로치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오는 때와 같아서 無形에서 有形이 生하는 것이지만, 앞으로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갈 때에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때와 같아서 生長하던 것이 모두 收斂으로 變하고 이제까지 茂盛하던 잎사귀가 서리를 맞아서 떨어지고 여문 열매와 쭉정이가 分別되는 것이다.

 

地球 달 사람의 變化

宇宙의 天體는 그 組織이 陰陽의 二元作用으로 되어 收斂作用과 發散作用이 있으므로 그 生生하는 過程에는 스스로 한번 陰하고 한번 陽하고 하여 收斂하는 時運과 發散하는 時運

 


 

116-1

이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太陽系의 宇宙도 時運의 變化가 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地球도 不斷히 變化하고 있는 것이다. 地球는 發生하는 當時에 單番에 完成된 것이 아니오 거기에도 生長成의 象이 있어 生의 時運에 生하고 長의 時運에 자라며 지금에는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는 때이다. 地球가 長의 時運에는 樹木生成의 理와같이 內部에 있는 陽氣가 外部로 發宣放出되어 陰陽이 調和치 못하므로 氣候의 極寒과 極暑가 있고 南北極의 地가 凍結하는 것이오 成의 時運에는 陽氣가 外部로부터 內部에 入하여 地熱이 높아지고 極寒과 極暑가없어 氣候가 溫和하고 南北極地方의 얼음이 풀리는 것이니 지금에 南北極의 얼음이 조금씩 풀리고 있는 것은 地球가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는 徵兆이다.

 


 

116-2

地球에 어떠한 變化가 生하면 地球의 胎宮으로 되어있는 달에도 또한 變化가 生하는 것이다. 달의 組織은 艮山과 兌澤으로되고 艮兌는 乾坤의 六子中에 最少하므로 母體의 胎宮中에서 자라고 있는 胎兒의 象이 되는데, 胎中의 胎兒는 반드시 여물어서 母腹外로 出産하는 것이라 成의 時運이되면 胎中에 있는 달도 또한 여물어서 變化하고 달이 變化하면 그 軌道가 또한 變化하는 것이다. 달의 變化하는 象을 生成의 理로써 보건대, 사람의 胎兒가 母腹中에 있을 때는 母體와 逆行하여 倒生의 象이 되는 것인데 胎兒가 出産하면 母體와 같이 頭가 天을 向하고 足이 地를 밟는 것이니, 이 理에 依하여 지금에는 달의 表面이 地球를 向하고 裏面은 늘 裏面대로 있는 것인데 달이 여물어서 軌道가 變化하면

 


 

117-1

月體가 뒤집혀서 지금의 表面이 안으로 숨어버리고 지금의 裏面이 地球를 向하게 되는 것이다. 달의 消하는 그믐에는 달이 太陽의 앞에 있고 달의 始生하는 初生에는 달이 太陽의 뒤에 있는 것이니 이 理에 依하여 成의 時運에 달이 出生하는 때는 달이 太陽의 앞에서 太陽의 뒤로 돌아가는 象이 되어 日月地球의 軌道의 相互關係가 모두 變하는 것이다.

달의 軌道는 어떻게 變化하는가 하면 易學에는 乾坤의 正策數가 三百六十으로 되어 있어 이것이 周天의 正度數 三百六十度와 一歲의 正日數 三百六十日을 象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周天度數는 三百六十五度餘가 되고 一歲의 日數는 三百六十五日餘가 되어 度數는 正度數보다 五度餘가 더 많고 日數는 正日數보다 五日餘가 더 많으니 이 五日餘는 正日數보다 늘어나는 閏日이다. 閏이라 함은 懷

 


 

117-2

妊生殖하여 數가 늘어난다는 뜻이라, 지금은 長의 時運이므로 天時에도 每歲 五日餘의 閏日이 生하는 것이며 每歲에 五日餘의 閏日이 生하는 까닭에 日月의 運行을 標準한 太陰曆에는 五歲에 約 兩次의 閏日을 두고 閏月이 드는 해는 十三月이 되어 이것을 閏歲라하고 閏歲의 總日數는 平均 三百八十四日인데 이것은 一歲의 正日數 三百六十日보다 二十四日이 더 많으니, 그러므로 二十四日은 閏日數의 象이 되는 것이다. 母胎中의 胎兒는 閏生의 象이므로 胎兒의 數는 二十四로 되고 지금의 地球가 約 二十四度를 傾斜하고 있는 것도 또한 母胎中에 胎兒의 閏數 二十四가 보태어 있는 까닭이다. 胎中에서 자라고 있는 胎兒는 자람이 끝나면 반드시 여물어서 母腹外로 出産하는 것이오, 胎兒가 出産하면 胎兒의 閏數 二十四가

 


 

118-1

줄어서 母體는 三百六十의 正數가 되는 것이므로 地球의 胎宮에서 달이 여물어서 軌道가 變하면서 出産하면 地球에서 二十四의 閏數가 줄고 正數 三百六十이 되어 地球의 傾斜가 바로 서는 것이니, 이가 地球와 달의 變化하는 때이다. 地球가 바로 서고 달의 軌道가 變하면 海洋과 潮汐에 큰 變化가 일어나서 水가 北地에서 汐하고 南天에서 潮하고 또 水가 萬折하여 東으로 向하는 것이니, 이가 成의 時運의 始로서 閏없는 三百六十日曆이 나오는 때이다.

 

註 ●胎宮 二十四數

易卦數는 六十四卦인데 六十卦는 父母數이오 四卦는 胎宮數이니 一卦 六爻로써 計算하면 六十卦는 三百六十으로서 正數가되고 四卦는 二十四로서 閏數가 되는 것이다.

 


 

118-2

易卦 六十四卦의 總爻數는 三百八十四數로 되어 閏歲 三百八十四日數와 同一하고 乾坤正策數 三百六十보다 二十四가 더 많으니 이 二十四는 胎宮 四卦의 爻數로서 그것이 胎宮에서 자라고 있는 胎兒의 閏數이다. 易經의 上經은 百八十爻이오 下經은 二百四爻로서 上下 傾斜의 象이 되는 것은 下經속에 胎宮 二十四爻가 들어 있는 까닭이니, 地球의 傾斜 約 二十四度도 이 理에 依한 것이다.

天地의 時運이 變化하면 사람의 生理에도 또한 變化가 生하는 것이니, 長의 時運에는 사람의 心氣가 主로 外向하여 權勢 財利 名譽等 外的 生活에 置重하고 生長競爭이 甚하며, 또 時運의 象을 生物로써 보면 長의 時運은 動物의 象이오 動物은 專혀 本能生活을하고 거의 全部가 個體生活을 하는 것이므로 사람도 長의 時運에는 本能生

 


 

119-1

活과 個體主義生活이 主生活로 되고 極端的으로는 動物生活에 墮落하는 者도 없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나 成의 時運이되면 사람들의 生理가 一轉하여 天性이 여물고 神作用이 生하여 能히 空間의 幽深과 時間의 未來를 通觀할 수가 있고 個體主義가 變하여 天下가 同人하고 世界人類는 모두 한 家庭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長의 時運에는 天地自然數가 九數까지만 자라고 十數의 자리가 열리지 아니하여 暗黑속에 싸여 있으므로 사람마다 그 뱃속에 獨自한 秘密을 감추고 있어 사람과 사람사이에 서로 信賴할 수가 없고 서로 利害關係로서 다투고 있어 이 世上은 公明할 날이 없는 것이다.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면 十數가 열려서 自然數가 具全하여 神의 作用이 行하고 사람들의 天性에 神의 作用이 行하면 이 世上에는 秘密이라는 것이 存在할 수도 없고 또 사람들의 마음이 光明하여 惡을 行하는 秘密을 뱃속에 두지도 아니하여 이 世上은 光華한 神世界를 이루는 것이다.

 


 

119-2

物質文明의 沒落과 精神文明의 發達

사람의 生理가 時運을 따라서 變化하므로 사람의 學問의 傾向도 또한 時運을 따라서 變化하는 것이다. 萬物의 生生에는 모두 生命과 神의 二元이 있는데, 生命의 運動은 無形에서 有形한 形質이 生하여 物質이 되고, 神은 無形하여 有形한 物質속에 갈무리하여 있고 사람의 天性 心情等 精神은 形質속에 갈무리하여 있는 神作用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形質이 자라기는 物質로써 하고 精神이 여물기는 神作用으로써하며, 또 사람은 자라는 일만을 自由意志에 依하여 行하고 生하고 여무는 일은 神作用에 依하여 行하는 것이므로 그 形質이 자라기 爲하여 物質生活을 營爲함에는 사람마다 그 個體의 自由에 依하여 行하는 것이다. 動物들은 天然物에 對하여 아무런 加工도 없이 그대로 먹고살지만 사람은 반드시 天然物에 人工을 加하여

 


 

120-1

그 所用하는 物資를 創製하는 것이니 이가 人工이 天工을 代成함이오 이는 사람에게 物을 創製하는 才能과 自由가 있는 까닭이다.

지금은 長의 時運이오 長의 時運은 形質의 자라는 때이므로 사람들은 自體가 자라기 爲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硏究하기에 心力을 다하고 있는데, 長의 時運의 初期에는 사람들의 生活이 單純하고 그 精神作用이 또한 어리므로 그 生活에 必要한 事物에 대한 硏究가 部分的으로는 進步와 發明이 깊지 아니하였으나 그 原理를 體系的으로 짜 놓은 學問은 없었으며, 사람들의 精神이 漸次 자람을 따라서 비로소 事物을 硏究하는 여러 가지 方法이 案出되고 그中에서도 特히 分析과 實驗에 依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찾아내는 學問이 생기니 이가 곧 科學이다.

 


 

120-2

科學이라 함은 分析과 實驗에 依하여 物質의 組織運行되는 原理를 證明하는 學問이오 分析이라 함은 草木의 자랄 때에 枝葉이 漸漸 나뉘움과 같은 것이니 科字도 草木이 자라서 가지가 나뉘운다는 뜻이며, 그러므로 科學은 長의 時運에 사람들이 自體가 자라기 爲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案出하여 系統的으로 그 原理의 體系를 세운 學問이다. 長의 時運의 初期에는 비록 科學이라는 學問은 없었으나 사람들이 人工으로써 天工을 代行하여 그 生活資料를 創製하여 살아온 것이오 이들 創製物은 賢哲한 先知者들이 나와서 發明發見한 것이니 이는 科學以前의 人工이나 그 以後의 人工이나가 모두 그 때와 環境에 따라서 사람의 精神에서 案出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에 온 世人이 科學의 偉大함을 敬歎하여 科學萬能時代가 되고 있으나 이것은 決코

 


 

121-1

科學의 偉大함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의 精神發達의 偉大함에 基因한 것이다. 사람의 精神에는 生하고 자라고 여물고 하는 發展이 있고 長의 時運의 사람의 精神은 時運과 함께 자라고 있으므로 사람의 自由意志에 依하여 能히 事物을 分析 實驗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인 科學이라는 學問을 發見한 것이니 그러므로 科學은 사람의 精神의 자라는 過程에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硏究하는 方法으로서 案出된 産物에 不過한 것이오 이는 사람의 精神이 偉大하여 그 자라는 때에 物質文明을 建設하기 爲하여 科學이라는 한 用具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科學은 長의 時運의 人類社會에 燦爛한 物質文明을 建設한 功績은 적지 아니하나 거기에는 스스로

 


 

121-2

一定한 限度가 있고 그 限度에 達하면 그 以上 더 자라지 못하고 도리어 病的症狀이 나타나는 것이다.

萬物에는 物質과 精神의 兩面이 있어 生長成의 運動을 行하고 있는데 사람은 精神이 善하기만 하면 無限性을 가지고 生하고 자라고 여물어서 神과 相通하는 것이지만 物質로 된 形質은 자라기만하고 여물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形質이 자람을 極하면 여무는 것이 아니라 老衰하여 消滅하는 길로 向하는 까닭이다. 이것을 草木으로써 보면 여름에 草木의 枝葉이 繁盛하여 靑綠이 滿地하면 그 榮華한 景致는 可謂 絶勝이다. 그러나 여름과 가을의 交代하는 어느 하루아침에 이르러 氣候의 變化로 因하여 秋風이 일어나면 이제까지 繁榮을 極

 


 

122-1

하던 枝葉의 榮華는 一時에 枯落하고 여문 열매만이 가지의 사이에 남게 되는 것이니, 枝葉의 榮華는 사람의 形質의 象이오 여문 열매는 사람의 여문 精神의 象이다. 人類社會는 宇宙의 時運에 應하여 長의 時運과 成의 時運이 있으므로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는 때에는 이제까지의 物質文明은 사람의 形質과 같이 또한 草木의 枝葉과 같이 반드시 자람을 停止하고 老衰枯落하는 것이오 그 뒤에는 사람의 여문 精神이 神作用을 行함과 같이 또한 草木의 열매가 여물어서 世世繼承하는 作用을 行함과 같이 반드시 한 次元 더 높은 神作用의 文明이 發生하는 것이다.

그러면 科學은 그 자람을 極하고 한 次元 높은 새 文明을 낳을

 


 

122-2

수가 없는가 하면, 科學은 分析實驗하는 方法을 通하여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찾아내는 學問이니 形而下學的인 物質의 面은 이러한 方法으로써 硏究할 수가 있으나 分析實驗의 領域外에 있는 形而上的 事物 例컨대 萬物의 씨는 처음에 어떻게 생기고 또 어떻게 여물어서 宇宙創造 當時에 생겨난 씨가 지금까지 世世繼承하여 傳來하는가 하는 原理라든가 萬物에는 그 生長成하는 自然法則과 整然不亂한 秩序가 어떻게 생겨서 各自가 獨立的으로 生成하면서 또한 全體가 有機的으로 함께 生成하고 있는가 하는 作用이라든가에 對하여는 一言半句의 答案도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科學은 사람이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찾

 


 

123-1

기 爲하여 案出된 學問이므로 科學으로서는 物質의 자라는 原理밖에는 硏究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形質의 자라는 동안에만 自由意志를 行使하고 科學은 사람의 自由意志에 依하여 案出된 學問이오 사람의 精神의 여무는 것은 神作用에 依하여 行하는 것이므로 科學으로써 事物을 硏究함에는 오직 形質의 자라는 範圍에 그치고 그 以上의 여무는 領域에 對하여는 거의 無知에 가까운 것이다. 더욱이 萬物은 모두 宇宙神에서 創造되고 神을 中心으로하여 그자라는 때는 遠心運動을 行하여 形質이 자라고, 그 여무는 때는 向心運動을 行하여 精神이 여물면서 神에게로 돌아가는 것인데, 科學은 形質의 자라는 原理를 찾는 物質學으

 


 

123-2

로서 遠心運動을 行하고 있으며, 遠心運動을 行하는 者는 神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므로 科學은 發達하면 發達할수록 神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내종에는 全然 神을 忘却하게 되는 것이니, 이 遠心運動에서 向心運動으로 넘어가는 轉換點이 곧 科學으로서는 넘을 수 없는 限度로서 한次元 더 높은 文明을 誕生할 수 없는 所以이다.

萬物에는 生長成의 運動이 있어 자라면 반드시 여물기로 되어 있으되 形質과 같은 것은 자람이 極하면 老衰하여 消滅의 길로 向하는데 이消滅의 길로 걸어가는 過程에 病的症狀이 일어나는 것이니, 老人들의 老衰가 곧 이 病의 症狀이다. 科學文明은 物質文明으로서 人間社會의 道德이나 善惡같은 것은 全然關涉하지 아

 


 

124-1

니하고 오직 物質生活의 一層向上을 爲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人類生活의 向上을 爲하여 案出한 科學이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原子武器를 만들어 가지고 瞬息間에 이 地球도 破壞할 수 있을만치 橫暴하여 人類의 生存을 威脅하고 있으니, 이는 科學이 老衰病에 걸린 症狀이다.

人口의 生産은 사람의 形質의 자라는 象이오 人類의 生生運動은 반드시 한번 陰하고 한번 陽하여 陰陽이 調和한 然後에 過度한 것도 없고 不及한 것도 없고 適當히 生하고 適當히 자라는 것인데, 長의 時運에 사람들의 氣가 모두 外向하고 그 崇尙하는 學問인 科學이 또한 자라는 方面으로 突進하여 發散하는 것만을 알고 內收할 줄을 알지 못하므로 形質이 過度히 자라서 人口의 生産이 急激히 膨脹하여 도리어 人類自體의 生活을 威脅하고 있으니, 이는 形質이 너무 자라서 老衰病에 걸린 症狀이다.

 


 

124-2

 

原子武器의 橫暴와 人口生産의 過剩은 科學이 形質의 자라는 일에만 偏向하고 여무는 原理를 알지 못하는 所致로 생긴 病的症狀이며, 이 病은 科學속에는 아무런 治療方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精神에는 生長成의 發展이 있는지라, 長의 時運에는 形質의 자라는 原理의 學問인 科學을 發明하여 燦爛한 物質文明을 建設한 것이오 科學에는 자라는 原理만 있고 여무는 原理가 없으므로 老衰하여 病的症狀이 생기고 있지만, 사람의 精神은 長의 時運에서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는 때에는 여물기 爲하여 자라기를 求하지 아니하므로 時運으로 더불어 함께 여물려고 하는 人類에게는 科學은 쓸 곳이 없는 묵은 學問이 되는 것이오 또 여문다는 일은 자라는 原理의 學問인 科學에게는

 


 


125-1

全然 想像조차 不到하는 未知의 境域이다. 그러므로 여물기를 求하는 사람에게는 여무는 原理의 學問이 必要한 것이오 이 學問은 곧 精神을 여물게 하는 神作用의 原理인 神學이다. 成의 時運에는 오직 神學만이 사람의 精神을 여물게 하여 過度히 자란 科學의 病的症狀을 克服하고 陰陽의 調和作用으로써 自然스럽게 人口의 生産을 調節하여 人類社會에 物質文明보다 한 次元 더 높은 精神文明을 建設하는 것이다.

神學에 依하여 精神文明이 建設되면 사람들은 精神이 여물어서 지난날에 形質의 자람을 爲主하던 物質文明을 다시 追求하는 者가 없어서, 物質文明은 秋風이 일어난 뒤의 枝葉과 같이 枯落하고 神學에 依한 精神文明이 枯落한 枝葉사이의 열매

 

 

125-2

와 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神學이라 함은 어떠한 것인가 하면 佛敎의佛經 儒敎의易學 基督敎의聖經과 같이 宇宙神과 사람과의 關係를 말한 學問이 곧 神學이오 神學에 依한 精神文明이라 함은 從來의 科學은 사람의 精神이 모두 外向하여 外的知識을 求하므로써 事物에 對한 知識은 廣汎하게 얻을 수가 있었으나 自身의 精神은 昏暗하여 靈的으로는 하나의 無知한 人間이 되고 있는 것인데, 神學은 精神이 內向하여 스스로 內明하므로 神作用이 生하고 神과 相和하여 肉眼으로 볼 수 없는 事物도 能히 靈眼으로써 볼 수가 있고, 肉耳로써 들을 수 없는 일도 能히 靈耳로써 들을 수가 있고 未來의 事物을 豫觀할 수도 있는 것이니, 이가 神學에 依한 精神文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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