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歷史
普通网友
这个作者很懒,什么都没留下…
展开
-
朝鮮歷史筆寫本原稿 (韓長庚編)
1950年代 初全永壽 韓聲遠 筆 (1950年代初)原创 2016-06-20 15:51:53 · 537 阅读 · 0 评论 -
百濟와 新羅의 發展 (朝鮮歷史 韓長庚)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발전(發展)백제(百濟)는 건국(建國) 후(後) 점차(漸次)로 마한(馬韓)의 땅을 탈취(奪取)하더니 불과(不過) 이십(二十) 여년(餘年)에 전역(全域)을 통합(統合)하고 반도(半島) 서남부(西南部)의 일대국(一大國)을 형성(形成)하였다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여 농산(農産)이 많고 일면(一面)이 대해(大海)인 관原创 2013-12-16 08:57:42 · 974 阅读 · 0 评论 -
三國時代의 社會 (朝鮮歷史 韓長庚)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사회(社會)삼국시대(三國時代)의 토지제도(土地制度)는 모두 국유(國有)로 하고 귀족(貴族) 공신(功臣)들에게 전장(田庄) 식읍(食邑) 등(等)으로 나누어주고 거기에 농경(農耕)에 종사(從事)할 노예(奴隸)를 아울러 주니 고구려(高句麗)에는 좌식(坐食)하는 대가(大家)가 만여호(萬餘戶)이오 하호(下戶)는 그들에게 양식(糧食原创 2013-12-16 08:55:27 · 819 阅读 · 0 评论 -
原始生活 (朝鮮歷史 韓長庚)
원시생활(原始生活)아국(我國)의 원시시대(原始時代)에는 주(主)로 어패(魚貝)와 조수(鳥獸)를 잡아먹고 초근목실(草根木實)을 캐어 먹고 짐승의 가죽을 벗겨서 입고 석굴(石窟)과 움집에서 살았다. 농사(農事)라고는 오직 서(黍 기장)가 있을 뿐이오 서(黍기장)는 어떤 토지(土地)에서든지 잘 생육(生育)되고 파종시기(播種時期)의 조만(早晩)에 영原创 2013-12-16 09:10:15 · 1361 阅读 · 0 评论 -
女眞關係
여진(女眞)관계(關係)여진(女眞)은 처음에 발해국(渤海國)을 구성(構成)한 말갈(靺鞨)의 일족(一族)이라 발해(渤海)가 계단(契丹)에게 망(亡)한 뒤에 여진족(女眞族)이 남만주(南滿州) 방면(方面)에 거주(居住)하는 자(者)는 계단(契丹)에게 귀화(歸化)하여 숙여진(熟女眞)이 되고 백두산(白頭山)을 중심(中心)으로 한 북만주(北滿州)와 옥저(沃沮原创 2013-12-14 20:05:36 · 1135 阅读 · 0 评论 -
蒙古亂
몽고란(蒙古亂)최충헌(崔忠獻)이 권세(權勢)를 잡은 후(後)에 정치(政治)가 어지러워서 몽고(蒙古)의 세력(勢力)이 크게 밀려 들어와서 새 판국(版局)이 벌어졌다. 몽고(蒙古)는 본시(本是) 외몽고(外蒙古)의 온온한 기슭에서 유목(遊牧)하는 부족(部族)이러니 성길사한(成吉思汗)(징기스칸)이 나서 사방(四方)의 여러 부족(部族)을 합쳐서 큰 세原创 2013-12-14 18:58:16 · 1614 阅读 · 0 评论 -
繼生하는 叛亂
계생(繼生)하는 반란(叛亂)숙종(肅宗)의 아들 인종(仁宗)은 나이 어리고 그 외조부(外祖父) 이자겸(李資謙)이 권력(權力)을 잡고 스스로 높은 벼슬에 나아가서 국사(國事)를 마음대로 뒤흔들고 구성(九城) 싸움에 나가서 공(功)을 세우고 돌아온 척준경(拓俊京)을 심복(心腹)으로 부려서 온갖 포학(暴虐)한 일을 다 하였다. 그는 자기(自己)에게 반대(反原创 2013-12-14 19:02:50 · 1925 阅读 · 0 评论 -
新羅의 衰亡
신라(新羅)의 쇠망(衰亡)신라(新羅)의 통일(統一)한 후(後)에는 통일(統一)하기 이전(以前)의 웅대(雄大)한 기백(氣魄)과 선미(善美)한 풍습(風習)이 점점(漸漸) 사라지기 시작(始作)하니 이것이 사라짐이 곳 쇠망(衰亡)할 전조(前兆)이다. 그 이유(理由)는一. 통일이전(統一以前)에는 왕위(王位)를 서로 현자(賢者)에게 사양(辭讓)하더니 통原创 2013-12-14 20:23:37 · 594 阅读 · 0 评论 -
高句麗의 隆盛 (朝鮮歷史 韓長庚)
고구려(高句麗)의 융성(隆盛)고구려(高句麗)의 국도(國都) 졸본(卒本)은 평야(平野)가 적고 외적(外敵)을 막기에 불편(不便)함으로 얼마 후(後)에 국내성(國內城)에 옮기고 다시 환도성(丸都城)에 옮겨서 서(西)로 요하(遼河)방면(方面)으로 내려가고 남(南)으로 한반도(韓半島)로 내려가기 시작(始作)하였다. 고구려(高句麗)가 서(西)와 남(南原创 2013-12-16 08:59:31 · 1388 阅读 · 0 评论 -
農業朝鮮 1938.3 옛날 농민은 어떻게 살았나?
箕子에 對한 중국史書의 曲筆,조선史書의 事大思想 農業朝鮮 1938.3 옛날 농민은 어떻게 살았나? 殷民의 東來句麗,扶餘,韓,貊 等의 나라가 주나라와 交通하던 時代(시대)에 殷人箕子(은인기자)가 亡命(망명)하여 그 무리 五千人(오천인)을 거느리고 朝鮮(조선)의 遼西地方(요서지방)에 나라를 세우고 人民(原创 2014-01-08 21:28:29 · 1426 阅读 · 0 评论 -
朝鮮歷史 韓長庚 編
韓長庚 編 朝鮮歷史 書生 全永壽 韓聲遠 筆寫原创 2016-05-24 16:12:01 · 478 阅读 · 0 评论 -
殷民의 東來
農業朝鮮 1938.3 옛날 농민은 어떻게 살았나?箕子에 對한 중국史書의 曲筆,조선史書의 事大思想 殷民의 東來句麗,扶餘,韓,貊 等의 나라가 주나라와 交通하던 時代(시대)에 殷人箕子(은인기자)가 亡命(망명)하여 그 무리 五千人(오천인)을 거느리고 朝鮮(조선)의 遼西地方(요서지방)에 나라를 세우고 人民(인민)에게 耕作法과 養蠶法을 가르치니转载 2014-10-17 09:27:57 · 578 阅读 · 0 评论 -
朝鮮歷史 題目
我國歷史 아국(我國)의 자연환경(自然環境)6http://skyyoon.tistory.com/116원시생활(原始生活)9http://skyyoon.tistory.com/115고조선(古朝鮮)10http://skyyoon.tistory.com/114 삼국(三國)의 흥기(興起)16http://skyyoon.tistory.com原创 2014-08-23 15:25:38 · 840 阅读 · 0 评论 -
古朝鮮 (朝鮮歷史 韓長庚)
고조선(古朝鮮)지금(只今)으로부터 사천여년(四千餘年) 전(前)의 옛날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태백산(太白山)에 내려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우고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하니 중국(中國)의 요(堯)임금 때요 이 해를 아국(我國)의 기원원년(紀元元年)이라 한다.단군조선(檀君朝鮮)은 천여년(千餘年)동안 계속(繼續)原创 2013-12-16 09:08:32 · 1843 阅读 · 0 评论 -
四色黨爭
사색당쟁(四色黨爭)인조(仁祖)의 반정(反正)은 서인(西人)의 손으로써 된 것임으로 서인(西人)이 정권(政權)을 홀로 차지하고 광해군(光海君)을 도와서 악정(惡政)을 행(行)하던 대북파(大北派)는 전멸(全滅)되고 소북파(小北派)와 남인(南人)은 정치(政治)에 참여(參與)하는 자(者)가 극(極)히 적었다. 그러나 서인(西人)의 횡포(橫暴)가 차차(次原创 2013-12-02 20:38:49 · 1437 阅读 · 0 评论 -
儒敎와 佛敎의 文化 (朝鮮歷史 韓長庚)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의 문화(文化)고려(高麗) 건국(建國) 이후(以後)에 유교(儒敎)가 들어와서 관가(官家)에서 세운 교육기관(敎育機關)에 의(依)하여 상당(相當)한 발달(發達)을 이루고 이러한 관학(官學)외(外)에 사학(私學)이 있어서 한때 크게 떨치었고 학생(學生)들은 관학(官學)보다도 사학(私學)에 가기를 좋아하였으며 따라서 관학(原创 2013-12-14 20:09:41 · 996 阅读 · 0 评论 -
高麗의 滅亡 (朝鮮歷史 韓長庚)
고려(高麗)의 멸망(滅亡)공민왕(恭愍王) 말년(末年)에 원(元)나라가 북(北)으로 쫓겨가고 명(明)나라가 중원(中原)을 차지하게 되니 (단기 삼천칠백일년) 고려(高麗) 조정(朝廷)에서는 대륙(大陸) 외교(外交)에 대(對)하여 두 가지 의견(意見)이 대립(對立)되었다. 최영(崔瑩)은 오래 동안 원(元)나라에 가 있어서 저쪽의 사정(事情)을 잘 알고原创 2013-12-13 19:58:07 · 1427 阅读 · 0 评论 -
端宗과 世祖 (朝鮮歷史 韓長庚)
단종(端宗)과 세조(世祖)세종(世宗)의 다음에 문종(文宗)은 재위(在位)한지 겨우 이년(二年)이오 그 아들 단종(端宗)이 왕(王)이 되니 나이 겨우 십이세(十二歲)이다. 그런데 당시(當時) 단종(端宗)에게는 모후(母后)가 없고 근친(近親)이라고는 숙부(叔父) 칠인(七人) 즉(卽) 수양대군(首陽大君) 以下 七人君이 있어 모두 强盛하니 國民들은 王의原创 2013-12-13 19:19:28 · 1184 阅读 · 0 评论 -
日本과의 關係 (朝鮮歷史 韓長庚)
일본(日本)과의 관계(關係)세종(世宗)때에 옥포(玉浦)를 열어서 무역(貿易)을 허락(許諾)한 것이 그 후(後) 차츰 왜인(倭人)의 수효(數爻)가 늘어서 수천명(數千名)에 이르며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을 어기는 일이 적지 아니하더니 중종(中宗) 오년(五年)(단기 삼천팔백사십삼년 경오(庚午))에 대마도(對馬島)와 연결(連結)하여 난(亂)을 일原创 2013-12-13 18:44:57 · 1741 阅读 · 0 评论 -
中宗反正後의 國政 (朝鮮歷史 韓長庚)
중종반정(中宗反正)후(後)의 국정(國政)중종(中宗)의 반정(反正)은 연산군(燕山君)의 학정(虐政)에 괴로움을 받던 백성(百姓)과 두 번의 사화(士禍)에 기(氣)가 꺾어진 유학계(儒學界)에 한 광명(光明)을 주고 활기(活氣)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사회(社會)의 행방면(行方面)에 개혁(改革)의 기운(氣運)이 움직였다. 이때 김굉필(金宏弼)의 제자原创 2013-12-13 18:53:03 · 1214 阅读 · 0 评论 -
亂後의 形勢
난후(亂後)의 형세(形勢)칠년(七年)동안의 대란(大亂)은 비록 끝났으나 기경(起耕)치 못한 토지(土地)가 적지 아니하고 집과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고 생계(生計)를 잃은 백성(百姓)이 수(數)없이 많고 산곡(山谷)에 피난(避難) 갔던 사람들은 기아(飢餓)를 견디지 못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하면서 겨우 고향(故鄕)에 돌아 왔으나原创 2013-12-05 21:51:12 · 508 阅读 · 0 评论 -
西洋文化와의 交涉과 外國貿易
서양문화(西洋文化)와의 교섭(交涉)과 외국무역(外國貿易)이조(李朝)는 정주학(程朱學)을 숭상(崇尙)하고 그 외(外)의 학문(學問)은 일체(一切)로 이단(異端)이라 하여 배척(排斥)함으로 학술(學術)의 발달(發達)할 여지(餘地)가 없었다. 산업(産業) 방면(方面)에 있어서는 오직 농업(農業)을 중(重)히 여기고 공업(工業)을 천(賤)히 여기며 혹시原创 2013-12-02 20:49:09 · 932 阅读 · 0 评论 -
英祖 正祖의 文化
영(英) 정(正)의 문화(文化)실학(實學)이 한번 일어난 후(後)로 이 방면(方面)에 뜻을 두는 학자(學者)가 많고 또 영조(英祖)와 정조(正祖)는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여러 가지 글을 편찬(編纂)하고 민간(民間)에서는 역사(歷史) 지리(地理) 정치(政治) 경제(經濟) 실업(實業) 산학(算學) 의학(醫學) 실학(實學)에 대(對)한 연구(硏究)와原创 2013-12-02 20:37:16 · 851 阅读 · 0 评论 -
洪景來亂 民亂
개국(開國)시대(時代)철종(哲宗)의 뒤를 이어 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의 제이자(第二子명복(命福))가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고종(高宗)이오 때에 나이 십이세(十二歲)이었다. 흥선군(興宣君)이 대원군(大院君)으로 되어 실제(實際)의 정권(政權)을 잡으며 외척(外戚)의 세도(勢道)를 막기 위(爲)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력(勢力)을原创 2013-12-02 19:07:20 · 1610 阅读 · 0 评论 -
開國時代
개국(開國)시대(時代)철종(哲宗)의 뒤를 이어 흥선군(興宣君이하응(李昰應))의 제이자(第二子명복(命福))가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가 고종(高宗)이오 때에 나이 십이세(十二歲)이었다. 흥선군(興宣君)이 대원군(大院君)으로 되어 실제(實際)의 정권(政權)을 잡으며 외척(外戚)의 세도(勢道)를 막기 위(爲)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력(勢力)을原创 2013-12-02 18:59:42 · 1022 阅读 · 0 评论 -
燕山君의 失政 (朝鮮歷史 韓長庚)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성종(成宗) 왕비(王妃) 윤씨(尹氏)는 연산군(燕山君)의 생모(生母)라 윤비(尹妃)가 왕(王)에게 불손(不遜)한 일이 있음으로 왕(王)이 폐위(廢位)하였다가 죽였다. 연산군(燕山君)은 성질(性質)이 원래(元來) 난폭(亂暴)한데 그 모(母)가 원사(寃死)함을 알고 심중(心中)에 깊은 악감(惡感)을 품고 있었다. 이때原创 2013-12-13 19:09:47 · 1327 阅读 · 0 评论 -
三國의 文化와 經濟 (朝鮮歷史 韓長庚)
삼국(三國)의 문화(文化)와 경제(經濟)삼국(三國)에는 국문(國文)이 없고 중국(中國)의 한문(漢文)을 수입(輸入)하여 썼으므로 일부(一部) 귀족계급(貴族階級)은 그것을 이용(利用)할 수 있었으나 일반(一般)백성(百姓)은 아는 자(者)가 극(極)히 적었고 한문자(漢文字)가 국어(國語)에 맞지 않음으로 일을 기록(記錄)할 때에는 한자(漢字)의原创 2013-12-15 21:52:35 · 875 阅读 · 0 评论 -
渤海의 建國 (朝鮮歷史 韓長庚)
발해(渤海)의 건국(建國)고구려(高句麗)가 망(亡)하고 일변령(釰弁令)등(等)의 광복운동(光復運動)이 실패(失敗)에 돌아감에 그 백성(百姓)들이 혹(或)은 당(唐)나라에 강제(强制)로 옮겨지고 혹(或)은 신라(新羅)로 망입(亡入)하기도 하였으나 또한 많은 사람들이 북방(北方)으로 유입(流入)하였다. 이때 만주(滿洲) 북부(北部)에는 말갈족(靺鞨族)이原创 2013-12-15 21:50:39 · 1487 阅读 · 0 评论 -
土地制度
一. 토지제도(土地制度)토지제도(土地制度)는 태조(太祖)가 신라(新羅)의 구제(舊制)를 습용(襲用)할 것을 원칙(原則)으로 정(定)하고 만사 초창중(萬事 草創中)에 있어 그 세칙(細則)을 정(定)치 못하더니 오세(五世) 경종(景宗)때에 이르러 비로소 전국(全國)의 토지(土地)를 모두 공전(公田)으로 하고 균전제(均田制)에 의(依)하여 수전수전(授原创 2013-12-14 20:17:17 · 822 阅读 · 0 评论 -
中期의 隆盛
중기(中期)의 융성(隆盛)문종(文宗)의 세(世)는 건국(建國)한지 이미 일백삼십여(一百三十餘)이오 외(外)로는 북변(北邊)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이 쌓인 후(後)에 국경(國境)에 큰 일이 없고 내(內)로는 문화(文化)가 발달(發達)하고 도로(道路)를 열어서 교통(交通)을 편리(便利)하게 하니 물론(勿論) 당시(當時)의 교통(交通)은 지금과 같이 어原创 2013-12-14 20:06:43 · 807 阅读 · 0 评论 -
李朝建國 (朝鮮歷史 韓長庚)
이조(李朝)역대표(歷代表) 태조(太祖)정종(定宗)태종(太宗)세종(世宗)문종(文宗)단종(端宗)임신(壬申)기묘(己卯)신사(辛巳)기해(己亥)신미(辛未)계유(癸酉)721原创 2013-12-13 19:50:42 · 929 阅读 · 0 评论 -
李朝基礎의 完成 (朝鮮歷史 韓長庚)
이조(李朝)기초(基礎)의 완성(完成)세조(世祖)의 다음에 예종(睿宗)은 위(位)에 있은지 일년(一年)이오 성종(成宗)이 왕(王)이되니 이때는 이조(李朝)의 기초(基礎)가 굳어지고 또 여러 가지 제도(制度)가 갖추어졌다. 왕(王)은 유신(儒臣) 김종직(金宗直) 등(等)을 쓰고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문선(東文選)같은 책原创 2013-12-13 19:12:50 · 1311 阅读 · 0 评论 -
社會의 腐敗 (朝鮮歷史 韓長庚)
사회(社會)의 부패(腐敗)연산군(燕山君) 이후(以後) 육십여년(六十餘年) 간(間) 간신(奸臣)이 정권(政權)을 잡을 때가 많았고 명종(明宗) 말년(末年)에 이르러서는 정치(政治)가 극도(極度)로 어지럽고 화뇌(貨賂)가 성행(盛行)하여 사회(社會)는 부패(腐敗) 일로(一路)를 걷고 있었다. 외방(外方)의 공물(貢物)은 개국초(開國初)에 지방산물(地原创 2013-12-13 18:36:05 · 1313 阅读 · 0 评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