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色黨爭

原创 2013年12月02日 20:38:49

사색당쟁(四色黨爭)

인조(仁祖)의 반정(反正)은 서인(西人)의 손으로써 된 것임으로 서인(西人)이 정권(政權)을 홀로 차지하고 광해군(光海君)을 도와서 악정(惡政)을 행(行)하던 대북파(大北派)는 전멸(全滅)되고 소북파(小北派)와 남인(南人)은 정치(政治)에 참여(參與)하는 자(者)가 극(極)히 적었다. 그러나 서인(西人)의 횡포(橫暴)가 차차(次次) 심(甚)하였음으로 효종(孝宗) 말년(末年)으로부터 왕(王)은 서인(西人)을 싫어하고 남인(南人)을 등용(登用)하는 일이 많더니 효종(孝宗)의 다음 임금 현종(顯宗)에 이르러서는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함께 조정(朝廷)에 입(立)하였다.

이때 양파(兩派)의 당쟁(黨爭)으로서 소위(所謂) 예송(禮訟)이라는 것이 있으니 효종(孝宗)의 상(喪)에 그 계모(繼母) 조대비(趙大妃)가 어떠한 복(服)을 입어야 옳으냐 함에 서인(西人) 송시열(宋時烈) 등(等)은 일년(一年)이라 하고 남인(南人) 윤휴(尹鑴) 등(等)은 삼년(三年)이라 하여 서로 싸우다 서인(西人)이 이겼는데 현종(顯宗)때에 인선대비(仁宣大妃)(효종(孝宗)인(人))의 상(喪)에 다시 그 시어머니 조대비(趙大妃)의 복(服)을 서인(西人) 김수흥(金壽興) 등(等)은 구월(九月)이라 하고 남인(南人) 허적(許積) 등(等)은 일년(一年)이라 하여 이번은 남인(南人)이 이기고 오십년(五十年)동안을 정권(政權)을 잡고 있던 서인(西人)은 정계(政界)에서 쫓겨났다. 이때로부터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당쟁(黨爭)이 더욱 심(甚)하였는데 현종(顯宗)의 다음 임금 숙종(肅宗)의 초년(初年)에는 남인(南人)이 세력(勢力)을 얻고 있더니 숙종(肅宗) 육년(六年)에 서인(西人) 김석주(金錫冑) 등(等)이 당시(當時)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는 허적(許積)의 서자(庶子) 허견(許堅)이 역모(逆謀)를 꾸몄다하여 역옥(逆獄)을 일으켜서 허적(許積) 윤휴(尹鑴) 등(等) 남인(南人)의 영수(領首)들이 원통(寃痛)한 죽음을 당(黨)하고 남인(南人)이 무고(無辜)히 죄(罪)를 입은 자(者)가 천(千)을 넘고 서인(西人)이 다시 정권(政權)을 잡으니 이를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 한다. 이때 서인(西人)의 수령(首領) 송시열(宋時烈)과 그 제자(弟子) 윤증(尹拯)과의 사이에 감정(感情)이 어긋나서 두 파(派)로 나뉘었는데 송(宋)의 편(便)을 드는 사람을 노론(老論)이라 하고 윤(尹)의 편(便)을 드는 사람을 소론(少論)이라 하니 이에 서인(西人)은 노론(老論) 소론(少論)으로 나뉘고 거기에 남인(南人)과 소북(小北)을 합쳐서 사색(四色)이라 일컬었다. 숙종(肅宗)은 본시(本是) 변덕(變德)이 많은 임금이라 어느 한가지 일이 몇 해 동안 계속(繼續)되면 곧 염증(厭症)이 나서 새 것을 좋아하는 성질(性質)이 있었다. 숙종(肅宗) 십오년(十五年)에 왕(王)이 왕비(王妃) 민씨(閔氏)를 싫어하고 희빈(嬉嬪) 장씨(張氏)를 사랑하고 그가 낳은 아들을 세자(世子)로 봉(封)하려 함에 송시열(宋時烈) 등(等) 서인(西人)이 이를 반대(反對)하였음으로 왕(王)은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민비(閔妃)를 폐(廢)하고 다시 남인(南人)을 쓰니 고대(古代) 소설(小說)로 전(傳)해오는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왕(王)이 장빈(張嬪)에 혹(惑)하여 민비(閔妃)를 몰아냄을 풍자(諷刺)한 글이었다.

그러나 숙종(肅宗) 이십년(二十年)에 이르러 왕(王)은 전(前)에 한 일을 후회(後悔)하고 민비(閔妃)를 복위(復位)하고 장빈(張嬪)을 쫓아내고 다시 서인(西人)을 불러 쓰니 이로부터 남인(南人)들은 아주 정계(政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정계(政界)에서 물러난 남인(南人) 학자(學者)들은 벼슬을 체념(諦念)하고 주(主)로 실학(實學) 방면(方面)으로 향(向)하여 고서(古書)의 고증(考證)과 새로운 연구(硏究)가 많이 생기니 그 중(中)에 가장 유명(有名)한 사람은 이익(李瀷)(성호(星湖)이니 그는 유형원(柳馨遠)(반계(磻溪)의 새 학풍(學風)을 계승(繼承)하여 후진(後進)의 길을 개척(開拓)한 대(大) 학자(學者)이었다. 남인(南人)의 패퇴(敗退)는 비록 남인(南人)을 위(爲)하여는 소조(蕭條)한 감(感)이 없지 아니하나 우리 나라 학문(學問)의 발달(發達)을 위 하여는 크게 경하(慶賀)할 일이었다.

정계(政界)의 번복(飜覆)이 이와 같이 잦고 정쟁(政爭)이 이와 같이 험(險)함으로 국가(國家)의 대사(大事)는 모두 방기(放棄)하는 형편(形便)이었다. 임진(壬辰) 병자(丙子)의 두 대란(大亂)을 겪은 뒤에 토지(土地) 겸병(兼倂)의 폐(弊)는 더욱 증장(增長)하여 사회(社會)는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의 양대(兩大) 계급(階級)으로 분열(分列)하고 소작인(小作人)들은 생계(生計)가 점점(漸漸) 어려워서 산림(山林) 중(中)에 들어가서 임목(林木)을 불사르고 경지(耕地)만드는 경향(傾向)이 많았으니 이가 화전(火田)의 시(始)이다. 그러나 조정(朝廷)에서는 이에 대(對)한 아무런 대책(對策)이 없고 이로부터 각지(各地)에 울창(鬱蒼)하던 임목(林木)은 날로 황폐(荒廢)하여졌다.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와 두만강(豆滿江) 상류(上流)에 천제(天際)에 높이 솟아있는 백두산(白頭山)은 우리 나라의 주산(主山)으로 되어있으나 청국(淸國)과의 사이에 과재(跨在)하여 양국(兩國) 국경선(國境線)이 명확(明確)치 아니하였다. 세종왕(世宗王)이 육진(六鎭)을 설치(設置)한 후(後)에 두만강(豆滿江) 북편(北便)의 주민(住民)들이 번호(藩胡)라는 이름으로 대대(代代)로 조정(朝廷)에 공물(貢物)을 바치더니 인조(仁祖)때에 청국(淸國)이 이 지방(地方)에 살던 동족(同族)을 데려감에 이 지방(地方)이 공한(空閑)한 채로 버려져서 피아(彼我)의 유민(流民)들이 비밀(秘密)히 입거(入居)하였다. 그래서 여기가 어느 나라 땅이냐 하는 문제(問題)가 가끔 일어나더니 숙종(肅宗) 삼십팔년(三十八年) 임진(壬辰)에 청국(淸國) 강희(康熙) 제(帝)가 이 지방(地方)의 국경(國境)을 밝히기 위(爲)하여 목극등(穆克登)을 우리 나라에 보내었다. 이때 조선(朝鮮)에서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사이에 격렬(激烈)한 당쟁(黨爭)이 벌어지고 있는 때라 국경문제(國境問題)의 중요성(重要性)은 염두(念頭) 에 두지 아니하고 북경(北境) 지리(地理)에 아무런 견식(見識)이 없는 사람들을 백두산(白頭山)에 보내어 목극등(穆克登)과 함께 경계(境界)를 정(定)하는데 목극등(穆克登)의 주장(主張)에 일언(一言)의 항변(抗辯)도 없이 유유순종(唯唯順從)하여 백두산(白頭山)하(下) 십리(十里)허(許)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서(西)는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東)은 토문강(土門江)이 된다는 글을 새기니 이가 소위(所謂) 백두산(白頭山) 정계비(定界碑)이다.

비(碑)를 세운 후(後)에 조정(朝廷) 안에서 여러 가지 물론(物論)이 일어나고 북변(北邊)에 있는 관리(官吏)가 실지(實地)로 이 일대를 답사(踏査)하여 조정(朝廷)에 보고(報告)하였는데 그 요지(要旨)는 정계비(定界碑)의 서편(西便)으로 흐르는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는 틀림이 없으나 동편(東便)으로 흐르는 물은 사파(四派)가 있으니 가장 북편(北便)에서 흐르는 제일파(第一派)의 물은 비(碑)에서 거리가 멀고 또 북(北)쪽으로 들어가니 이는 문제(問題) 삼을 것이 없고 그 물의 남(南)에서 흐르는 제이파(第二派)도 비(碑)와의 거리(距離)가 조금 멀고 제삼파(第三派)의 물은 비(碑)에서 가장 가까운데 이 물을 따라 내려가면 점점(漸漸) 북(北)으로 굽어져서 깊이 호지(胡地)로 들어가고 제사파(第四派)인 가장 남(南)쪽에 있는 물은 비(碑)에서 가장 멀고 이것이 두만강(豆滿江) 상류(上流)가 된 것이니 결국(結局) 정계비(定界碑)에 기록(記錄)된 所謂 토문강(土門江)이라 함은 제삼파(第三派)의 물을 말함이 확실(確實)하다고 하였다. 이 제삼파(第三派)의 물은 간도(間島)의 북(北)쪽을 흘러서 두만강(豆滿江) 하류(下流)에 이르러 합수(合水)된 것임으로 지금의 간도(間島) 지방(地方)은 정계비문(定界碑文)대로 해석(解釋)하면 당연(當然)히 조선(朝鮮)의 영토(領土)가 되는 것이오 이것이 후일(後日) 양국간(兩國間)의 분쟁(紛爭)거리가 되는 것이다.

울릉도(鬱陵島)는 동해(東海) 중(中)에 있는 일(一) 고도(孤島)라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우산국(于山國)이라는 독립국가(獨立國家)로 있다가 신라(新羅)의 군현(郡縣)으로 된 것이다. 이조(李朝) 초기(初期)에는 주민(住民)이 있어 농업(農業)과 어업(漁業)으로 생활(生活)하더니 그 후(後)에 왜구(倭寇)의 침입(侵入)이 자주 있어서 주민(住民)들이 안주(安住)할 수가 없고 또 국가(國家)에서 군사(軍士)를 보내어 수비(守備)할 수도 없음으로 조정(朝廷)에서는 주민(住民)을 전부(全部) 내륙(內陸)으로 옮기고 무인도(無人島)를 만들었다. 울릉도(鬱陵島)와 그 동(東)쪽에 있는 독도(獨島)는 어획(漁獲)이 많은 곳임으로 일본어민(日本漁民)들이 비밀(秘密)히 들어와서 자유(自由)로 고기잡이를 하고 혹(或) 조선어민(朝鮮漁民)이 고기 잡으러 들어가면 그들은 鬱陵島를 일본(日本) 영토(領土)라 하여 축출(逐出)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숙종(肅宗)때에 안용복(安龍福)이 여러 어민(漁民)들과 함께 울릉도(鬱陵島)에 고기 잡으러 들어갔더니 일본어선(日本漁船)이 이미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있기로 안용복(安龍福)은 우리 어민들과 합력(合力)하여 몰아버린 일이 있는데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알고 도리어 법금(法禁)을 범(犯)하고 밀어(密漁)하였다는 죄명(罪名)으로 벌을 받았다.

그러나 안용복(安龍福)은 우리 나라 영토(領土)를 우리 나라 사람이 지키지 못하고 일본어민(日本漁民))의 임의(任意) 사용(使用)에 맡기는 것이 원통(寃痛)하여 다시 어선(漁船)을 타고 들어갔더니 역시(亦是) 일본어선(日本漁船)이 와서 있기로 이를 난타(亂打)하여 쫓아 보냈는데 마침 풍파(風波)가 일어나서 표류(漂流)하여 일본(日本)에 들어갔다. 안용복(安龍福)은 이 기회(機會)에 일본인(日本人)의 울릉도(鬱陵島) 밀어(密漁) 금지(禁止) 문제(問題)를 근본적(根本的)으로 해결(解決)하리라 하고 일본(日本) 막부(幕府)에 들어가서 이를 힐문(詰問)하더니 막부(幕府)에서는 이는 대마도(對馬島)의 어민(漁民)들의 소위(所爲)요 중앙(中央) 정부(政府)에서는 알지 못하는 일이며 타국(他國) 영토(領土)에 들어가서 고기 잡는 것은 부당(不當)한 일이오 또 이로 인(因)하여 양국간(兩國間)의 화(和)를 상(傷)함은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대마도(對馬島) 주(主)에게 보내는 글을 안용복(安龍福)에게 주었다. 안용복(安龍福)은 그 글을 가지고 대마도(對馬島) 주(主)에게 전(傳)하니 대마도(對馬島) 주(主)는 막부(幕府)의 엄명(嚴命)에 겁(怯)을 먹고 안용복(安龍福)에게 사과(謝過)까지 하였다. 안용복(安龍福)은 다시 막부(幕府)에 들어가서 다시는 밀어(密漁)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約束)의 글을 받아 가지고 나라에 돌아오니 이는 외교(外交)의 일대(一大) 성공(成功)이오 또 울릉도(鬱陵島)를 일본(日本) 영토(領土)라고 주장(主張)하여 일후(日後) 양국(兩國)간(間)에 분쟁(紛爭)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危險性)을 이미 막은 것이다. 조정(朝廷)에서는 이 말을 듣고 안용복(安龍福)의 공(功)을 상(賞)주려는 말은 없고 조정(朝廷)의 명령(命令)이 없이 외국(外國)과 교섭(交涉)한 죄(罪)로 사형(死刑)에 처(處)하려 하였다. 이때 조정(朝廷)안에는 사형(死刑) 논(論)에 반대(反對)하여 상공죄론(賞功罪論)이 강력(强力)히 주장(主張)되니 이 논(論)은 안용복(安龍福)이 일본인(日本人)의 밀어(密漁)를 금지(禁止)한 공(功)은 크게 상(賞)주어야할 것이오 사사(私私)로이 외국(外國)과 교섭(交涉)한 죄는 벌(罰)하여야할 것인데 만일 안용복(安龍福)을 죽이면 이는 한것 대마도(對馬島) 주(主)로 하여금 통쾌(痛快)한 생각을 가지게 하고 우리 나라의 수치(羞恥)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 논(論)이 마침내 이겨서 안용복(安龍福)은 한동안 옥(獄)에 갇혔다가 방면(放免)되고 상(賞)은 받지 못하였다.

숙종(肅宗) 일대(一代)는 당쟁(黨爭)이 가장 심(甚)하여 국토(國土)의 영토(領土)문제(問題)까지 등한시(等閑視)하기에 이르렀고 숙종(肅宗)의 뒤를 이은 경종(景宗)은 희빈(嬉嬪) 장씨(張氏)의 소생(所生)이라 처음에 숙종(肅宗)때에 경종(景宗)을 세자(世子)로 봉(封)하려는 것을 노론(老論) 송시열(宋時烈) 등(等)이 반대(反對)하였고 또 경종(景宗)이 즉위(卽位)한 후(後)에 노론(老論)들은 경종(景宗)이 병약(病弱)하다하여 왕(王)의 이복(異腹)아우 영조(英祖)를 왕(王)의 대리(代理)로 세워서 정사(政事)를 대청(代聽)케 하려하니 이에 소론(少論)들은 노론(老論)을 역적(逆賊)으로 몰아서 소위(所爲) 노론곡신(老論哭臣)이라는 李頣命 金昌集 李健命 趙泰采 等을 죽이고 많은 사람을 罪주니 이는 경종(景宗) 원년(元年) 신축(辛丑)으로부터 다음해 임인(壬寅)에 걸친 일임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라 하는데 사화(士禍)라 함은 비사류파(非士類派)가 사류(士類)를 모해(謀害)하는 것이오 사류(士類)와 사류(士類)와의 모해(謀害)는 사화(士禍)가 아니라 당쟁(黨爭)의 살육(殺戮) 극(劇)이니 소위(所謂) 辛壬士禍는 하나의 사류(士類) 간(間)의 살육(殺戮)극(劇)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경종(景宗)은 신병(身病)이 있어 재위(在位)한지 겨우 사년(四年)이오 영조(英祖)가 즉위(卽位)하니 영조(英祖)는 총명(聰明)함이 이조(李朝) 제왕(諸王) 중(中)에서 넉넉히 중주(中主)는 되는지라 일직부터 당파(黨派)싸움이 국가(國家)의 모든 불행(不幸)의 원인(原因)임을 깊이 느끼고 친(親)히 노론(老論)의 閔鎭遠과 少論의 李光佐의 화해(和解)를 권(勸)하고 조정(朝廷)에서는 여러 색목(色目)의 사람을 함께 쓰기로 하니 이를 탕평책(蕩平策)이라 한다. 당인(黨人) 중(中)에는 저희들의 지나친 행동(行動)을 반성(反省)하고 국가(國家)의 앞날을 위(爲)하여 탕평책(蕩平策)에 호응(呼應)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당화(黨禍)때문에 참혹(慘酷)한 화(禍)를 당(當)한 집의 자손(子孫)들은 양파(兩派)가 함께 조정(朝廷)에 입(立)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더욱이 노론(老論)들은 기어(期於)이 신임당화(辛壬黨禍)의 원수(怨讐)를 갚으려 하였다. 왕(王英祖)은 아무리 탕평(蕩平)하기를 권(勸)하되 노론(老論)들이 끝까지 응(應)하려하지 아니함으로 「당쟁(黨爭)도 국가(國家)가 있은 연후(然後)의 일이오 만일 당쟁(黨爭)때문에 국가(國家)가 망(亡)하면 당인(黨人)들은 어느 곳에 가서 당쟁(黨爭)을 할 것인가」하여 정(情)으로 읍언(泣言)한 일도 있고 몇 차례는 일이(一二)일간(日間) 단식(斷食)하고 당인(黨人)들의 반성(反省)을 촉구(促求)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당쟁(黨爭)은 이미 원결수심(怨決讐深)하고 난치(難治)의 고질(痼疾)로되어 왕(王英祖)의 읍소(泣訴)나 단식(斷食)으로써 화해(和解)될 것이 아니었다. 이에 왕(王英祖)은 탕평책(蕩平策)에 응(應)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점차(漸次)로 멀리하고 당쟁(黨爭)에 깊이 관계(關係)되지 아니한 사람들을 쓰게되니 조정(朝廷)안에서 당쟁(黨爭)에 깊이 관계(關係)되지 아니한 사람은 주(主)로 척리파(戚里派)이었고 이로부터 척리파(戚里派)의 대두(擡頭)하는 경향(傾向)이 나타나서 순조(純祖)이후 팔십여년(八十餘年) 간(間)을 외척(外戚) 전횡(專橫) 시대(時代)를 만들었다. 처음에 세조(世祖)때에 유신파(儒臣派) 대(對) 척리파(戚里派)의 싸움이 일어나고 그 싸움이 구십년(九十年)동안을 계속(繼續)하다가 명종(明宗) 말년(末年)에 유신파(儒臣派)가 승리(勝利)를 얻더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유신(儒臣) 동지(同志) 간(間)에 당쟁(黨爭)이 일어나서 이래(爾來) 백(百)육칠십년(六七十年)간(間)을 혈투(血鬪)를 연출(演出)하고 마침내 자체(自體)의 부패(腐敗)로 인(因)하여 다시 전일(前日)의 정적(政敵)이던 척리파(戚里派)를 등장(登場)케 하니 이는 세사(世事)의 한 과보(果報)로써 역사(歷史)는 복(覆)치 아니하면서 또한 반복(反覆)하는 것이다.

영조(英祖)가 비록 탕평책(蕩平策)을 쓰고 있으나 정계(政界)의 이면(裏面)에는 여전(如前)히 격심(激甚)한 당쟁(黨爭)의 조류(潮流)가 흐르고 있고 각지방(各地方)에는 선현(先賢)을 향사(享祀)하고 유사(儒士)들의 독서처(讀書處)로 되어 있는 서원(書院)은 당쟁(黨爭)의 근거지(根據地)로 되어 있으며 타당(他黨)과의 사이에는 서로 통혼(通婚)치 아니함은 물론(勿論)이오 지방(地方)에서 일어나는 사소(些少)한 일까지도 모두 당쟁(黨爭) 꺼리로 이용(利用)하였고 영조(英祖) 초년(初年)에는 소론(少論)과 남인(南人)이 합세(合勢)하여 이인좌(李麟佐)를 대장(大將)으로 하여 영남(嶺南)에서 병(兵)을 일으켜 정국(政局)을 전복(顚覆)시키려는 반란(叛亂)까지 일어났다. 영조(英祖) 중년(中年)에 세자(世子)로 하여금 대리(代理) 청정(聽政)케 하였는데 세자(世子)의 처사(處事)가 당인(黨人)들의 이해(利害)에 맞지 아니함으로 당인(黨人)들은 백방(百方)으로 모략(謀略)을 꾸며서 왕(王)과 세자(世子)와의 사이를 이간(離間)시키고 일보(一步)를 진(進)하여 왕(王英祖)의 부자간(父子間)의 감정(感情)의 갈등(葛藤)을 일으키더니 필경(畢竟) 세자(世子)를 왕(王)에게 참소(讒訴)하여 이를 폐(廢)하고 뒤주 속에 넣어서 죽이기에 이르니 이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이오 정조(正祖)의 부(父)이다.

그럼으로 정조(正祖)의 신하(臣下)들 중(中)에서 김구주(金龜柱)는 세자(世子)를 죽임이 옳다 하고 홍봉한(洪鳳漢)은 옳지 않다 하여 두 파(派)의 의견(意見)이 나뉘어지니 김(金)의 편(便)에 가담(加擔)한 사람을 벽파(僻派)라 하고 홍(洪)의 편(便)에 가담(加擔)하는 파(派)를 시파(時派)라 하여 이로부터 사색(四色)의 싸움보다도 시벽(時僻)의 두 파(派)가 서로 맞서서 정조(正祖) 일대(一代)는 이 싸움으로 날을 보내었으니 정조(正祖)가 그 부(父)의 원사(寃死) 참사(慘死)한 것을 몹시 슬퍼함으로 왕(王)의 뜻을 받드는 사람은 시파(時派)가 되고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은 영조(英祖)의 처리(處理)할 일이니 이를 비난(非難)할 수 없다 하는자(者)는 벽파(僻派)가 되니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은 당쟁(黨爭)의 여파(餘波)가 왕실(王室)에 미친것이오 국가정치(國家政治)에는 아무 관계(關係)가 없는 일인데 이것으로써 또 서로 가부(可否)를 다투고 있는 것은 세력(勢力) 쟁탈(爭奪)을 위한 일(一) 방편(方便)으로 이용(利用)한 것이다.

영조(英祖)와 정조(正祖)의 세(世)는 사색(四色)이 없어진 것은 아니오 또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와의 싸움이 일어났으나 정조(正祖)도 현명(賢命)한 임금이라 영조(英祖)의 정책(政策)을 답습(踏襲)하여 탕평책(蕩平策)을 썼음으로 숙종(肅宗)의 때와 같은 유혈(流血)의 참극(慘劇)은 별(別)로 없어서 인심(人心)이 안정(安定)하였다.

그리하여 왕(王)은 민생문제(民生問題)에 크게 유의(留意)하였으니 영조(英祖)는 당시(當時) 평민(平民)의 장정(壯丁)들이 군포(軍布)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무명 이필(二疋)씩 바치었는데 이것이 백성(百姓)에게 과중(過重)한 부담(負擔)이 되고 있음으로 왕(王英祖)의 이십육년(二十六年)부터 균역법(均役法)을 시행(施行)하여 군포(軍布)를 한 필(疋)씩 감(減)하고 그 대신(代身) 어염(魚鹽) 선박(船舶)에도 과세(課稅)하였다.

조엄(趙儼)은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감저(甘藷)(고구마)를 가져와서 심으니 이가 우리 나라에서 감저(甘藷)를 심은 처음이다. 조정(朝廷)에서는 감저(甘藷)가 구황곡식(救荒穀食)으로 중요(重要)한 것이라 하여 삼남(三南) 각지(各地)에 심게 하니 수십년(數十年) 동안에 각지방(各地方)에 널리 보급(普及)되니 정조(正祖)때에 이르러 전국(全國)에서 산출(産出)되는 감저(甘藷)의 수량(數量)을 조사(調査)케 한바 의외(意外)에 남해안(南海岸)의 몇 부락(部落)에 겨우 얼마간 남아 있을 뿐이오 그 외(外)에는 종자(種子)조차 없어져 버렸다. 왕(王)은 크게 놀래어 그 원인(原因)을 조사(調査)하니 농가(農家)에서 감저(甘藷)를 심으면 군현(郡縣)의 이속(吏屬)들과 토호(土豪)들이 값도 내지 않고 무료(無料)로 토색(討索)하고 그 토색(討索)에 응(應)하지 아니하면 무슨 구실(口實)을 만들어서 잡아다가 엄형(嚴刑)을 가(加)하니 농민(農民)들은 감저(甘藷)를 심은 까닭에 파산(破産)할 지경(地境)에 이른 자(者) 적지 아니 하였음으로 필경(畢竟) 종자(種子)까지 없애버린 것이었다. 이에 왕은 엄명(嚴命)을 내리어 토색(討索)하는 자(者)를 엄금(嚴禁)하고 그 재배(栽培)함을 극력(極力) 장려(獎勵)한 결과 드디어 우리 나라의 주요(主要)한 생산물(生産物)이 되었다.

정조(正祖)는 또한 전국(全國)에 영(令)을 내리어 농업기술(農業技術)의 우수(優秀)한 것이 있으면 그 요령(要領)과 방법(方法)을 적어서 조정(朝廷)에 올리라 하니 이에 전국(全國)으로부터 수리시설(水利施設) 농용거(農用車)등(等) 농업상(農業上) 유익(有益)한 계획(計劃)과 경험담(經驗談)이 많이 제출(提出)되었다. 왕(王)은 농업(農業)을 장려(獎勵)하는 의미(意味)로 좋은 안(案)을 제출(提出)한 사람을 뽑아서 서울에 불러다가 한자리에 모으고 각자(各自) 안(案)을 설명(說明)케 한 후(後) 후(厚)히 상(賞)을 주고 그 안(案)을 모아서 농서(農書)를 만들어 전국(全國)에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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